[스포츠][KBL] 정영삼 은퇴
부사호 작성일 05-26 조회 13,220
https://n.news.naver.com/sports/basketball/article/065/0000231967
가스공사가 인수했지만, 전신 전자랜드에는 드래프트때마다 슬픈 전설이 있습니다.
豊四凶一(풍사일흉)
흉년인 드래프트에서는 귀신 같이 1픽을, 풍년인 드래프트에서는 귀신같이 4픽을 찾아가던 전설이 있습니다.
물론 3픽 되서 정효근 뽑을 때부터 이 흉학한 전설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고, 지금은 저때만큼 로터리 운이 나쁘진 않습니다.
그리고 정영삼은 이 전통을 이어간 선수 중 유일하게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낸 선수 중 한명이죠.
김태술, 이동준, 양희종, 소위 말하는 연세대 빅3가 나오는 드래프트에서 2픽이 걸렸지만 당시 단장이던 박종천의 환상적인 무브로 이미 4픽이 걸린 LG랑 픽 교환을 해놓은 상태라 귀신 같이 4픽을 찾아가는 위엄을 선보이며 뽑은 선수가 노경석과 함께 건국대의 외로운 에이스를 맡았었던 정영삼이였죠.
대학들의 학사 일정은 추춘제고 리그의 일정은 춘추제였던지라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드래프트 된 해에 데뷔 못하고 이듬해 데뷔하는 구조였는데요.
드래프트 직후 팀에 합류한 정영삼의 모습을 보며 당시 외국인 선수였던 키마니 프렌드가 대체 이 팀은 왜 팀 최고의 선수가 경기를 못 뛰냐?라고 의문을 표했다는 일화들이 알려지며 전자랜드팬들로 하여금 귀신 같이 찾아간 4픽에서 부질 없을지도 모르는 희망을 주섬주섬 챙기게 만들었죠.
그리고 데뷔한 루키는 데뷔한지 얼마 안 되서 선수 본인도 지금까지도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언급한 경기를 만들어냅니다.
많은 사람들이 KBL 최고의 슬래셔를 꼽으라면 당연히 플래시 썬, 김선형을 뽑을겁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당연히 김선형이 맞습니다.
다만 팬심이 들어간 전자랜드 팬들은 대부분 2경기를 언급하면서 다른 이름을 댈겁니다.
그리고 데뷔한지 한달도 채 안 된 루키는 슈퍼 캐리가 무엇인지 보여주며 KCC 상대로 팀을 승리로 이끌어내며 전자랜드 팬들의 머릿 속에서 풍사일흉의 아픔을 지워주게 만듭니다.
이 시즌 아쉽게도 신인왕은 차지 못했지만, 정영삼이 보여준 경기력은 전자랜드팬들에게도 우리도 슈퍼 루키 있다!라고 어깨를 피게 만들어준 데뷔시즌이였습니다.
그리고 베이징 올림픽 최종 예선에 참가하는 대표팀에 불려가 전설의 마 니 드라기치랑 쇼다운 떠봤나?하는 경기를 남기게 되죠.
이 경기가 앞서 언급한 2경기 중 나머지 1경기입니다.
특유의 리듬과 스텝으로 돌파 장인의 칭호를 얻으며 상무로 입대했지만, 상무에서 이후 커리어 내내 발목을 잡게 되는 고질적인 허리 부상을 얻게 되었고, 본인과 전자랜드팬들은 또 다시 좌절을 맛보게 됩니다.
그러나 본인은 부단한 노력 끝에 약점으로 지적 받던 슛을 개선하며 다른 스타일로 팀의 버팀목이 되어주며 39살까지 커리어를 이어왔습니다.
부상 이후에도 기술은 어디 가지 않는다는듯이 종종 번뜩이는 돌파를 보여줬고, 이는 장착한 슈팅과 함께 전자랜드의 벤치 타임의 득점을 책임져줬습니다.
이름마저 연고지의 지역 번호와 똑같아서 그 누구보다도 인천과 찰떡이였던 노장의 마지막은 인수기업의 연고지가 자신의 고향과 같았기에 고향에서 보내게 되서 기대가 컸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전자랜드 팬 중에서도 그나마 대구로 가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분들도 꽤 있을겁니다.
032형의 고향이니깐요.
시즌 시작도 하기 전에 핵심 선수의 시즌 아웃, 시즌 전부터 이어져온 구단과 연고 도시와의 마찰 등등 어수선하게 마지막 시즌을 보내게 된 것 같아 팬인 저도 이렇게 아쉬운데, 본인은 얼마나 아쉬울지 짐작도 안 갑니다.
그래도 이 꿈도 희망도 운도 없던 프랜차이즈에서 안 좋은 전통을 깨주며, 묵묵하게 커리어를 이어 온 정영삼의 앞날에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바래봅니다.
가스공사랑 대구시는 어휴, 대구시는 뭐 제가 대구시민도 아니니 할 말은 없고, 가스공사는 은퇴식이나 성대하게 챙겨줬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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