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엽과 삼성, 서로가 원했고 최고가 되었다
돌쇠앤가마니 작성일 09-13 조회 4,256
#1. 1994년 12월, 삼성은 고교 최고 왼손투수로 꼽힌 경북고 3학년 이승엽을 잡기 위해 애썼다. 고졸우선선수로 지명했지만, 대학과의 스카우트 전쟁이 치열했다. 결국 삼성은 당시 고졸 신인 최고대우인 1억5200만원이라는 파격적인 대우로 이승엽과 계약을 체결했다. 이문한 당시 삼성 스카우트는 "이승엽이 연고지 구단에서 일찍 프로 선수가 되겠다는 뜻이 강했다"고 회상했다.
국내에 복귀한 이승엽. 5일 오후 서울강남구 청담동 리베라호텔에서 삼성 입단 기자회견
#2. 17년이 흐른 2011년 12월. 이승엽은 삼성에 두 번째로 '입단'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의 8시즌을 뒤로 하고 복귀를 선언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고향팀이 굉장히 그리웠다. 돌아올 수 있어서 매우 좋다"고 말했다.
이승엽(40)과 삼성은 서로를 원했다. 삼성과 이승엽은 함께 최고가 됐다.
◇삼성이 이승엽에게…
1995년 프로 입단 당시 이승엽의 포지션은 투수였다. 경상중 시절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경북고 2학년 땐 우승을 차지한 청룡기 결승전에서 마운드에 섰다. 타격도 뛰어났다. 1994년 세계청소년대회 우승멤버로 대회 홈런(3개)·득점(13점)왕에 올랐다. 삼성엔 김태한을 제외하곤 믿을 만한 왼손 투수가 모자랐다. 에이스 박충식은 방위병 복무로 풀시즌을 뛸 수 없었다. 하지만 입단 뒤 이승엽은 경북고 시절 부상 때문에 왼쪽 팔꿈치에 수술을 받았다.
이 수술은 그의 야구 인생을 바꿔놨다. 미국 베로비치 전지훈련에선 원래 투수조 명단에 포함됐다. 하지만 일주일 만에 타자 훈련을 받았다. 이승엽과 삼성은 큰 결단을 내렸다. 타자로 전향한 것이다.
이승엽의 타자 전향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지도자는 우용득 당시 감독과 박승호 타격코치다. 우 감독은 "당시 이승엽은 8월 이후에나 캐치볼이 가능한 몸 상태였다. 따듯한 곳에서 재활을 진행하려 전훈 명단에 넣었다. 하지만 입단 첫 해엔 투수로 1군 마운드에 서기엔 어려웠다. 그래서 타격 훈련을 한 번 시켰는데 소질을 봤다. 양준혁이 1루수를 보고 있었지만 발도 괜찮았던만큼 외야수로 전향시키고, 이승엽을 1루에 넣었다"고 회상했다.
선수 자신의 뜻이 가장 중요했다. 박승호 코치가 이승엽에게 '타자 전향' 의사를 물었다. 이승엽은 주저 없이 "괜찮습니다. 좋습니다"라고 답했다. 외모는 풋풋하고 앳됐지만, 눈빛만큼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해 이승엽은 타율 0.285, 13홈런, 73타점으로 성공적인 데뷔 시즌을 보냈다.
우용득 감독은 계약 3년째이던 1995년을 끝으로 삼성 수장에서 물러났다. 우 감독은 "곧바로 백인천 감독이 지휘봉을 잡아 이승엽에게 일본 스타일의 손목 사용법을 전수했다. 그 뒤 이승엽의 장타력이 크게 좋아졌다"고 회상했다. 입단 당시 주장이던 류중일 감독은 "처음엔 중장거리 타자 유형이었는데 유능한 감독과 코치를 만나면서 장거리 스윙 궤적으로 바뀌었다"고 덧붙였다.
이정훈 前삼성 라이온스 선수(1995~1996), 이승엽이 삼성에 입단한 1995년, 이정훈도 한화에서 트레이드돼 같은 유니폼을 입었다. 현역 시절 ,악바리,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투지 넘치는 선수였다.
이승엽은 품성이 좋은 선수로 사랑을 받는다. 이 전 스카우트는 "가정 교육이 워낙 좋았다. 가르치기보다는 처음부터 '된 선수'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명문 삼성에서 당대 최고 스타들을 보면서 많이 배웠다. 그 중 한 명이 1991~92년 타격왕 이정훈이었다. 이승엽의 좌우명은 '진정한 노력은 배반하지 않는다'다. 이승엽은 "이정훈 선배가 자주 하던 말이다. 신인 시절 나는 근성이 모자랐다. 경기에서 지거나 안타를 치지 못해도 분하지 않았다. 그때 이 선배에게 근성을 배웠다"고 회상했다.
지금도 초심을 잃지 않았다. 올해 KBO리그 통산 타점 신기록을 세웠고, 2000안타도 달성했다. 기록 달성 뒤 이승엽은 "팀 성적이 좋지 않다"며 기쁜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일 통산 600홈런을 앞두고서도 "최대한 빨리 달성해 팀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다"고 말한다.
◇이승엽이 삼성에…
이승엽도, 삼성도 한국시리즈 우승에 너무 목말랐다. 포스트시즌 최다 진출팀 삼성이지만 2001년까지 시리즈 우승을 한 번도 달성하지 못했다.
2002년 기회가 왔다.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한 삼성은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를 거친 LG와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었다. 4차전까지 3승1패로 앞선 삼성은 5차전을 내줬고, 홈에서 열린 6차전 9회 초까지 6-9로 뒤졌다. 6차전마저 내준다면 분위기는 시리즈는 원점으로 돌아간다.
10일 대구구장에서 벌어진 삼성증권배 2002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6-9로 뒤지던 9회말 이승엽이 동점홈런을 친 후 환호하고 있다.
9회말 1사 1·2루에서 타석에 들어선 이승엽은 당시 최고 마무리 이상훈에게 극적인 3점 홈런을 터뜨렸다. 이승엽은 홈런을 때린 뒤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다. 그가 지금까지 친 홈런 중 가장 큰 액션이었다. 삼성은 다음 타자 마해영의 끝내기 홈런으로 KS 첫 우승을 차지했다. 이승엽이 삼성의 20년 묵은 우승의 한(恨)을 풀어줬다. 2002~2003년 홈런·타점 1위를 차지한 그는 이듬해 일본 무대에 진출했다. "대구를 떠나본 적이 없어서 눈물이 났었다"고 한다.
8년 간의 일본 생활을 정리한 그의 다음 유니폼은 당연히 푸른색, 삼성이었다. 그는 입단 당시 "마음이 편해서 그런지 말도 잘 나오는 것 같다"고 반기며 "류중일 감독님께서 같이 하자고 했다. 큰 감동을 받았다. '돌아갈 수 있겠구나' 싶어 정말 좋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류 감독님이 한국시리즈 5연패를 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이제 4번 남았는데 우승 멤버에 내 이름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류 감독은 늘 "이승엽이 키플레이어다"고 꼽았다. 그러면서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이승엽을 6번 타순에 주로 배치했다. 30대 후반 나이로 접어들었지만 이승엽의 '클래스'는 특별했다. 한국 복귀 첫해였던 2012년엔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에 선정됐다. 삼성은 2012~2014년 통합 우승, 2015년 정규시즌 우승으로 21세기 최다 우승팀이 됐다. 이승엽은 "한국으로, 또 삼성으로 돌아와 재미있는 야구, 행복한 야구를 하고 있다. 야구장에 나오고 싶다"고 자주 말했다.
◇이승엽은 본보기다
이승엽을 아는 이들은 "정말 성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어릴 적 야구 입문을 반대했던 아버지께 '후회하시지 않게 열심히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춘광 씨는 "지금도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아내 이송정 씨는 "옆에서 보면 정말 대단하다. 또 성실하다. 그래서 존경한다"고 소개했다. 류중일 감독은 "승엽이는 야구만 미친 듯이 해온 정말 성실한 선수다"고 한다.
2013.06.04. 4일 목동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넥센- 삼성전에 앞서 넥센 박병호(왼쪽)가 삼성 이승엽에게 다가가 타격과 관련된 대화를 나누고 있다.
후배들이 본 대선배 이승엽도 그렇다. 본보기다. 외야수 박해민은 "자기 관리가 정말 철저하다. 이동일인 월요일에는 젊은 선수 몇 명만 타격 훈련을 한다. 그런데 이승엽 선배는 타격감이 좋지 않다 싶으면 고참 선수로는 보기 드물게 특별 타격 훈련을 한다. 선천적 재능도 갖고 있겠지만 노력이 뒷받침 됐기 때문에 위대합 업적을 쌓은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유격수 김상수는 "항상 가장 먼저 나와 몸을 푼다. 후배들이 보고 배우는 선배"라고 했다.
상대를 배려하는 선수기도 하다. 어린 투수에게 홈런을 때린 뒤에는 별다른 세리머니 없이 베이스를 돈다. 야구 후배가 상처받지 않을까 싶어서다.
10년 넘게 삼성 1군 매니저를 한 김정수 스카우트는 "선수들과 두루 친하고 후배들을 잘 챙긴다. 예절과 인사성도 갖췄다. 항상 모범이 되는 선수다"고 평가했다. 이승엽은 전지훈련 도중 후배들을 따로 불러 밥을 사곤 한다. 이승엽의 뒤를 잇는 1루수인 구자욱은 "말이 필요 없다. 자기 관리가 대단하다. 성실하고 겸손한 모습을 보고 배운다"고 했다. 김성래 삼성 수석코치는 "야구만 잘하면 A급 스타 밖에 안 된다. 하지만 이승엽은 다르다. 기본적인 예의를 갖췄다. 그렇기에 슈퍼스타가 됐다"고 언급했다. 그는 "후배라고 해도 같은 프로 선수다. 스스로 연구하고 발전해야 한다. 프로 선수로서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승엽은 은퇴시기를 정해놨다. 2017시즌이 끝난 뒤다. 성대하게 치러질 은퇴식에서 이승엽은 "삼성에 있어 행복했다"고 말하지 않을까. 삼성 후배들도 말할 것이다. "이승엽 선배와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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